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상 파괴주의 (문단 편집) === 사실은 교회가 분열한 것은 아니다? === 일단 동서 교회 대분열은 [[성상(조형물)|성상]] 파괴 운동 탓이 아니라 양자의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굳이 동서 교회 대분열의 결정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성상 파괴 운동보다는 이 사건으로부터 2~300년이난 지난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이 제시되는 편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당대인들이나 역사가들이나 모두 심각하거나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것은 주저한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상호 파문이란 게 있었던듯 없었던 듯 아리송 한데, 뭐 어쨌든 그 무렵에 서로 공적 관련성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사실 파고들면 들수록 교회가 분열된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나 신학적 근거를 들기가 매우 어렵다. 오죽했으면 [[동로마 제국]] 후반기 동서 교회 통합론이 고개를 들던 시점에, 교회 통합 반대론자들이 내세운 이유 중 하나가 [[성체성사]]에서 '''[[예송논쟁|동방은 발효된 빵을 성체로 쓰는데, 서방은 발효 안 된 빵을 쓴다]]'''였으니. 게다가 현대인의 시점에선 이 어처구니 없는 반대가 당대인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도 '''성상파괴 운동 자체가 기독교 전체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판정되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으로 교회가 분열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오늘날 [[정교회]]는 성상을 모시고 있다. 사실 성상 파괴 때문에 동서 교회가 분리된 것이라면, 성상 파괴 운동이 소멸된 시점 직후에 동서 교회의 화합이 거론되어야 했다는 것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마디로 성상 파괴 운동은 그저 [[그리스도교]] 전체 안에서 발생했던 이단으로 여겨졌고 이 사건으로 동방, 서방 양자의 신앙 자체가 달라진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는 얘기.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성상 파괴 반대를 주창하여 [[이리니]] 여제가 개최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이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가톨릭, 정교회 구분 없이 공인된 마지막 공의회인데[*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seven_ecumenical_councils|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초대 7대 세계공의회)]]에 의하면 이 'Second Council of Nicaea (787)'이 7개 중 마지막이다.], 이 자체가 당시 기독교 교회는 하나임을 인증하는 것이다. ~~단지 교황이 여전히 황제를 믿지 못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니케아에서 회의가 열렸다거나, 이 공의회가 양쪽이 참가, 인정한 마지막 공의회였다거나 하는 점이 걸리긴 하다만.~~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성상 파괴 운동은 교회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억눌러져 있던, 혹은 해소된 줄 알았던 불화를 일으켰고, 이는 동서 '''정치 체제'''의 분열을 촉발시켰는데, 정치 체제가 분열되자 결국에는 교회까지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얘기다. 그걸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의 내용이다. 일단 제국 내에서 종교 갈등이 발생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 '''이미 기독교, 제국, 로마는 [[이라클리오스 왕조]] 시절 내내 성상 파괴 문제보다 더 파괴적인 [[단성론]] 문제로 지지고 볶다가 기독교가 간신히 합을 맞춘지 얼마 안 되었다.''' 문제는 성상 파괴 갈등 와중에 로마 대주교의 교황 문제, 즉 서방교회의 관할권 문제가 불거졌고, 다시 종교 갈등이 터지자 급도 가장 높고 잠재된 불만도 가장 높은 로마 대주교가 반대 세력의 선봉장 격이 되어 버렸다는 점. 이렇게 되자 레온 3세는 일벌백계 + 실질적인 견제 차원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실행 직전 그레고리오 2세가 사망한 것이다. 후임 교황인 [[그레고리오 3세]] 역시 성상 파괴 반대의 기치를 올렸지만, [[콘클라베|새 교황 뽑느라]] 시간 보내고, 체포하라고 보낸 함대가 난파되고, 나폴리 공작이 거부하고… 뭐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되었고, 조세 권한을 박탈하네, 서로 연락을 끊네 마네 하며 이혼 조정 기간 중의 부부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실 로마 뿐 아니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어나 너 죽네 나 죽네의 드잡이질 상태(..)가 된 탓에 로마만 특별히 신경 쓰기가 어려워지기도 했고. 사실 성상 파괴주의는 단성론에 비해 이론이나 지지 기반이 꽤 약한 편이긴 했다. 과장 좀 하자면, 단성론은 엄청난 시간을 거치며 셀 수 없는 저작과 토론으로 갈고 닦아진 기독교 이론인데, 어디 시리아 변두리 군바리들이나 믿는 허접한 단성론 변종인 성상 파괴주의 따위야 동네 새내기 사제도 몇 마디 말로 격파 가능한 수준이었다. '''단지 문제가, 제국이 2~30년 간 제위 계승 문제로 내전 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 간신히 적절하게 들어선 새 황제가 이 이단 신앙을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라클리오스 이후 황제들이 대를 이어 고생 끝에 종교 문제를 극복하고 로마 교회에 대한 통제권도 휘어잡았는데, 이단자가 황제가 되어서 엉뚱한 신앙을 주장하는 바람에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릴 위기에 처한 셈이다. 또, ~~밥그릇 문제~~ 교황 문제와 관련해서는, 단성론 문제가 종결된 이후, 황제에 대한 복종의 일환으로 교황 자리를 로마 외부인 중에서 선출해왔었는데, 레온 3세의 등장 직후 이게 깨어졌다. 레온 3세가 모든 것을 망치고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선 이후로 교황 자리는 대체로 이탈리아인들의 밥그릇 대잔치가 되어 버렸다. 어쨌건 결과적으로는 서방 교회를 보호, 관리할 황제가 자기 스스로 손을 놔버린 셈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로마가 방치되다시피한 시기에 잠잠하던 [[랑고바르드 왕국]]이 다시 일어나 [[이탈리아 반도]]를 털어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교황과 이탈리아인들 입장에선 황제가 랑고바르드 왕국과 ~~[[짜고 치는 고스톱]]~~ 손을 잡고 로마를 터는 게 아닐까... 라는 두려움에 쌓이게 되었다. 애초에 동로마 역사에서 변방 야만인들에게 적당히 떡고물을 내주고 종속, 회유시키거나 용병으로 부려먹는 일은 밥 먹듯이 있어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런즉, 결국 교황의 입장에선 믿을 수 없는 이단자 황제 대신 '''아예 [[피핀 3세|서쪽에서 잘 나가는 다른 누군가]]를 수호자로 선택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실현시킨다.''' 뭐, 그 뒤론 [[피핀 3세]]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의 수호자를 대물려 받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기는 사라졌지만, 그 반대급부로 로마에 대한 카롤루스와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은 커졌다. 그런데 친 카롤루스 파였던 [[레오 3세]]가 교황좌에 오른 시점이 '''하필이면 동로마에서 성상파괴주의가 세를 잃고, 다시 로마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던 무렵이다.''' 결국 [[레오 3세]]가 아예 발상 전환을 해서,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 자리를 안겨주고 동로마와 영원히 작별하자'''는 쌈빡한 생각을 해냈으니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